철학자나 사상가는 태어나지 않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적어도 애 덤 스미스에게는 그랬다. 철학자와 길거리의 짐꾼은 서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두 사람의 성격이나 수입, 그리고 재능의 차이는 "인간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주로 습관이나 환경,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스미스는 지적했다. 스미스의 시대 역시 부모의 소득이 자녀의 미래를 결정하는 주요 요인이었던 것이다. 물론 행운도 있었다. 봉건 농경시대에서 집약적 농업시대로의 전환이든, 혹은 가내수공업 시대에서 공장식 생산 시대로의 전환이든 스미스가 태어났던 1723년의 커콜디에서 이 섬세한 청년은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스미스의 아버지가 세무 관리로 일하기도 했던 커콜디는 1644년 국왕 찰스 1세의 칙령에 의해 행정적으로 자치권을 얻음으로써 봉건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인근 던펌린의 영주령으로부터 독립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도 스코틀랜드의 다른 지역, 특히 하일랜드의 씨족사회에서는 중세 시대에 시작된 봉건제도가 그대로 유지되었고, 주민들은 계약이나 협정이 아닌 씨족 우두머리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심을 바탕으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주로 농부와 목동들로 구성된 이곳 주민들은 우두머리를 따라 전쟁이나 전투에 나서는 일이 잦았고, 결국 1745년 반혁명 세력인 자코바이트파가 보니 프린스 찰리를 영국의 국왕으로 세우기 위해 일어나자 여기에 동조하고 나서게 된 다. 그러나 이들은 컬로든 전투에서 국왕 조지 2세가 보낸 정규군에게 몰살당했고, 스코틀랜드 씨족 사회의 전통도 여기에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봉건시대의 속박에서 해방된 커콜디는 혼합된 경제를 발전시킨다. 기존의 목축업과 임업, 그리고 농업과 더불어 농부들이 남는 시간에 아마포(리넨의 한 종류-옮긴이)를 짜는 초기 산업화가 본격적인 산업화와 함께 진행되었고 국내와 국제무역도 번성했다.
커콜디의 세무 관리였던 스미스의 아버지는 이런 모든 경제활동을 잘 살펴볼 수 있었다. 아들과 이름이 같은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원래는 3대 라우든백작의 비서였고, 백작의 후원은 그 가 공무원으로 일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아들 스미스 역시 훗날 스코틀랜드의 이런 귀족 지주 가문을 위해 일하며 도움을 받게 된다.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이들 귀족 가문은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왕실의 합병을 지지하고 나섰고, 이것이 훗날 영국 혹은 대영제국의 시작이 된다. 그리고 스미스의 아버지는 이 합병이 곧 스코틀랜드에 무한한 기회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귀족들의 후원 이외에도 스미스의 성장을 이끄는 데 똑같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교육이다. 커콜디 의회는 1723년에 교실 두 개로 이루어진 학교 하나를 세운다. 스코틀랜드 곳곳에 세워진 이런 공립학교들과 수준 높은 대학들은 이 지역이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보여 준다. 대부분의 스코틀랜드 부모들은 그 자체로 귀중한 상품이라고 할 수 있는 자녀들의 노동력 손실과 그 밖의 재정적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자녀들을 수년 이상 학교에 보내려 했다. 스미스는 이런 학교를 다니며 읽기와 쓰기, 그리고 계산하기뿐만 아니라 라틴어와 그리스어까지도 배울 수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어록을 담은 '앵케 이리디온'의 18세기 영어 번역판 중에는 스미스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게 한 권 남아 있다고 한다. 스미스에게 있어 삶의 지침서 역할을 한 이 책은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이해를 통해 진정한 자유와 평온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스미스는 이렇게 스토아학파를 비롯한 고대의 여러 위대한 철학자들을 자신의 평생의 동반자로 삼았다.
1737년 애덤 스미스는 글래스고 대학교에 입학했고 프랜시스 허치슨이라는 얼스터 장로교 소속의 도덕학 담당 교수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허치슨은 장로교 안에서 이른바 '새로운 빛'이라고 불렸던 운동의 일부를 이끌었는데, 이 운동은 칼뱅주의로부터 이어지는 인간 본성에 대한 장로교의 엄격한 관점을 완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스미스는 허치슨의 강의를 들으며 인간의 본성을 죄로 물든 불완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만의 특성을 보인, 연구할 가치가 있는 대상으로 여기게 된다.
한편 글래스고 대학교에서는 기존의 라틴어 강의 대신 영어 강의를 개설하는 등의 개혁을 시도했고, 1751년 스미스는 이곳에 교수로 임명된다. 그는 허치슨이 떠난 자리를 채우고 귀족들에게 자녀들을 대학으로 보내도록 설득했다. 이제 대학은 더 이상 법률 가나 사제가 되려는 사람들만을 위한 곳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