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이던 김재익이 한국 경제를 되살려냈다는 신화가 지금까지도 진실처럼 믿어지고 있다. 재정팽창을 통해 경기를 부양하려다가 대규모 국제수지 적자를 일으켰고 그 바람에 심각한 외환위기를 겪어야 했는데도 말이다. 또한 우리 경제가 성장잠재력과 국제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IMF의 경제신탁 통치 이후에 재정 긴축과 강력한 구조조정 등 안정화 정책이 실시되었고, 김재익 수석이 떠난 뒤에 이 정책이 꾸준히 유지된 덕분이었는데 말이다. 이것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재정긴축은 1970년대 이래 지축 되던 고질적인 물가 불안을 잠재었다. 참고로 소비자물가는 1963년 이후 1973년 딱 한 해만 제외하고는 매년 두 자릿수의 상승률을 기록했다. 그 한 해마저 지표를 조작하여 이룩한 실적이었다. 반면에 전두환 정권 시절의 외환위기 이후에는 물가가 안정되었다. 이에 따라 국제경쟁력이 살아나면서 국제수지도 매년 절반 가까이 떨어지는 등 꾸준히 개선되었고, 1986년부터는 흑자로 돌아섰다. 경제성장률도 비교적 높은 수준을 장기간 지속했다.
이와 같이 안정화 정책이 성공적인 결과를 보이자 전두환 정권은 구제 금융을 모두 상환하여 IMF가 우리나라에서 물러간 뒤에도 재정긴축 등 안 정화 정책을 유지했다. 그래서 물가안정 추세는 1980년대 내내 지속되었다. 1984년의 소비자물가상승률은 2.3%, 1985년에는 2.5%, 1986년에는 2.8%, 1987년 3.1%를 기록했다. 이런 물가안정 속에서 세출 증가율까지 낮아짐으로써 우리 경제의 국제경쟁력이 높아지고 성장잠재력도 강화되었다.
실제로 1986년에는 성장률이 11.6%까지 치솟았음에도 물가불안이나 국제수지 악화와 같은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소비자물가상승률은 2.8%로 안정되었고, 국제수지도 47억 달러라는 대규모 흑자를 기록 했다. 1987년에도 성장률은 11.5%를 기록했으나 물가상승률은 3.1%에 불과했고, 국제수지 흑자도 사상 처음 100억 달러를 넘어섰다. 국제경쟁력 향상은 수출을 크게 증가시켰다. 수출 증가율이 1986년에 14.6% 1987년 36.2%, 1988년 28.4% 등을 기록했던 것이다. 수출의 이런 비약적인 증가는 우리 경제의 고속 성장을 이끌었다. 이런 점을 보더라도 박정희 정권의 팽창주의가 얼마나 무모했던가를 알 수 있다. 세출 증가율을 줄이고 물가만 안정시키면 우리 경제의 성장잠재력과 국제경쟁력은 무한히 커질 수 있음을 전두환 정권의 안정화 정책이 입증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전두환 정권 말기에는 경기가 다소 과열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물가불안과 부동산투기의 조짐이 나타나자 정부는 1987년 5월 15일 에는 물가관리 강화와 부동산투기 억제를 주 내용으로 한 '종합물가관리 대책'을 발표하여 사전에 봉쇄하려고 했다. 1988년 1월 12일에는 부동산 투기억제종합대책을 발표하고, 2월 15일 토지거래허가제 대상지역을 추가 지정하는 등 정권 말기까지 경제 안정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 효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소비자물가상승률은 1988년에 7.1%로 상승했고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뒤까지 그 추세가 이어져 1989년 5.7%, 1990년 에는 8.6%를 기록했다. 이런 물가불안과 부동산투기는 국제경쟁력과 성장잠재력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하고 말았다.
순탄치 않은 여정
전두환 정권의 경제정책이 처음부터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전두환 은 집권 직후에 재정팽창을 통해 경기부양을 도모하다가 외환위기를 일으킴으로써 국가 경제를 파탄 직전으로 몰아넣었다. IMF가 진주하여 우리 경제를 회생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그 피해는 만만치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산업합리화를 추진함에 있어서도 그 정책이 너무 미지 근하여 그 후유증과 부작용 그리고 재정적 부담만 키웠다. 또한 각종 정치 적 스캔들이 줄을 이었고, 이것들의 경제적 타격 역시 아주 크게 나타났다. 우선 1982년 5월 4일에는 소위 장영자 사건이라 불리는 어음부도 사건이 터졌다. 정치자금을 조성한다는 미명 아래 대량의 어음을 발행하여 사채시장에서 거액의 자금을 조성하다가 부도 사태가 터지는 바람에 공영토건과 일신제강 등이 도산하고 사채시장은 얼어붙었다. 이에 따라 신용수렴 현상이 나타나면서 금융시장 전체가 위기에 빠졌고 하필이면 이때에 외환위기까지 겹쳤다.
1982년 5월 7일에는 어음부도 사건의 사후대책을 발표했다. 단자시장에 350억 원을 지원하고, 증권시장에 수익증권을 설정하여 200억 원을, 그리고 증권금융을 통해 300억 원을 지원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덧붙여 중소기업에는 2천억 원을 특별 지원했다. 그렇지만 큰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고 곧이어 1983년 8월 29일에는 명성그룹사건이 발생했다. 은행을 통해 1천억 원을 변칙 조달한 뒤에 부도를 낸 것은 국내 은행의 공신력에 큰 상처를 입혔다. 이와 같은 두 사건의 여파로 금융경색이 지속되면서 기업의 자금난이 심화되고 금융기관의 부실화도 빠르게 진척되었다. 1984년과 1985년의 경기하강은 이렇게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