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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경제회복과 미군 통치 시기

by 마이티제이 2024.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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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은 한국에 급파된 미군 사령관 하지는 한국에 질서를 확립하는 일을 최초의 임무로 삼았다. 그가 한국에서 목격한 것은 일본 이 구축했던 경제조직의 완전한 붕괴였다. 한국 경제는 경제순환의 체계조차 붕괴되었던 것이다. 하지는 1945년 12월 1일 동아일보 복간 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여러분이 생활해 온 일본식 경제조직의 완전한 붕괴로 해방 직후의 수개월 동안에는 곤란이 있을 것입니다.

 

새 기원의 기초가 서는 최초의 수개월 동안에는 조선 국민의 눈앞에 직면해 있는 임무를 수행한다는 열의가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하지 사령관이 말한 '일본식 경제조직의 완전한 붕괴'란 한 나라가 발전할 수 있는 기본적 근간이 되는 성장 잠재력이 완전히 괴했음을 의미한 다. 당시 일본식 경제조직은 사람과 물자를 총동원한 전시체제였다. 즉 사람과 물자를 통제· 관리하는 극단적인 관료 통제 경제가 붕괴된 것이다.


그럼 새 기원의 기초가 서는 최초의 수개월 동안' 미군정은 과연 무엇을 했을까? 일본식 경제조직의 완전한 붕괴'가 있었다면 미국은 이를 복구하는 데 어떤 노력을 기울였고 어떤 도움을 주었을까? 경제체제가 무너졌으니 국민이 먹고살 정도로 원조를 해주거나 일본인들이 소유했던 농토를 비롯한 귀속재산 등의 생산시설을 신속히 불하하여 복구에 쓸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을까?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생산성을 확대했을까? 안타깝게도 모두 아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최초의 수개월 동안은 물론이고 미군정이 끝날 때까지 원조도 불충분했고 정책 집행조차 너무 늦게 취해졌다. 오히려 정통성이 있었던 김구 주석 의 임시정부나 일제총독부로부터 질서유지를 위임받은 건국준비위원회를 방해하고 파괴하는 일이 미군정의 사업이었다. 조선 국민은 그들이 임무를 수행하는데 있어 귀찮은 존재였을 뿐이다. 주한미군이 중점을 둔 것은 7만 2천 명이나 되는 미군 병사들의 건강을 관리하고 그들이 귀찮은 일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는 일이었다.


근본적으로 일본강점기에 만들어진 인프라는 매우 허약했다. 성장잠재력이 취약했다는 것이다. 우선 일제가 만든 생산시설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경제가 안정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윤이 있어야 한다. 자기에게 이익이 돌아와야 열심히 활동할 의욕이 생기 고 그것이 경제를 더 활력 있게 돌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일본강점기에 지어진 대부분의 제조업 생산시설은 군수물자를 조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패전과 함께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돌아 가자 생산시설들은 일시에 쓸모없게 돼버렸다. 생산시설의 대부분은 일본인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산시설의 가동이 멈추자 불필요해진 노동력은 뿔뿔이 흩어지고 일부 사람들은 폐허가 된 공장설비를 떼어내 팔아서 생활을 이어갔다. 관리도 허술했다. 점령이 종결될 때까지 재건을 위한 토대로 당연히 시행해야 할 조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1947년까지 공업시설을 비롯한 기타 여러 재산의 귀속을 표시하는 기본 재산목록도 없었다. 통계의 목표 중 하나 가 시설을 재활용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준비조차 이뤄지지 않았던 셈이다.


일본인이 약탈하여 점유했던 농지도 주인을 잃음에 따라 생산이 원활치 못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일본의 퇴각과 함께 일본인 소유의 농지를 우리 농민에게 되돌려줘 농업생산이 이루어지도록 하려 했지만, 미 점령군 이 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을 불법화함으로써 농업생산의 조기 회복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 점령군은 일본을 점령함과 동시에 일본에 농지개혁 을 실시했다. 그 결과 일본은 패전국임에도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빨리 경제를 안정시키고 성장할 수 있었다. 이처럼 혼란한 때에 국외로 이주했던 230만 명의 국외동포들이 해방 직후 한꺼번에 환국하면서 식량은 물론이고 다른 생필품 부족이 더 심각해졌다. 미군정 통치 말년에야 일본인 소유의 토지를 소작인에게 매각했고 그 매각의 대부분은 해방 후 3년이나 지난 1948년 5월 총선거 직전에 시행되었다. 한국인 지주들이 소유한 토지개혁은 한국전쟁 직전인 5월과 6월에 전격적으로 시행되었다. 이 두 번의 절묘한 타이밍에 이루어진 토지개 혁으로 농민들 사이에 엄존했던 실재적 또는 잠재적인 공산주의 영향력은 상당히 약화되었다. 미국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 경제보다 정치 논리였음이 확인된 것이다. 이러한 정치 논리조차 우리 국민이 철저하게 소외된 상태에서 이루어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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