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0년에서 1770년 사이에 영국 상품의 해외 시장은 영국 국내 시장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확대됐다. 1700~1750년 동안 국내 산업 생산량은 7퍼센트 증가한 반면, 수출 산업 생산량은 76퍼센트 증가했다. 1750~1770년 동안에는 그 수치가 각각 7퍼센트와 80퍼센트다. 영국 제품을 찾는 해외 수요가 이렇게 빠르게 높아진 점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근본적인 인간 생활의 변혁인 산업혁명을 가져온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18세기 영국에는 잘 발달된 시장을 갖춘 경제가 존재했고, 따라서 자본주 의와 시장에 반대하는 전통적인 태도와 이데올로기가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영국에서는 저렴한 가격으로 더 많은 공산품을 만들어내면서 이윤이 끊임없이 확대됐다. 따라서 점점 늘어나는 해외 수요에 자극받은 이윤 추구라는 동기는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기술 혁신의 폭발로 이어졌고, 영국 전역과 세계 대부분 지역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방직 산업은 초기 산업혁명에서 가장 중요했다. 1700년에 모직 산업계는 정부를 설득해 인도산 '캘리코'(면)의 수입을 금지하게 함으로써 국내 제 조업자들을 위해 국내 시장을 보호해 주었다. 그런데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해외 수요가 증가하면서 방직 산업이 기계화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실을 잣는 과정(방적 과정)과 직물을 짜는 과정 (방직 과정) 사이에 균형이 맞지 않아 많은 혁신이 생겨났다. 특히 자동북이라는 방직기가 발명돼 방직 과정의 속도가 상당히 빨라진 1730년대 이후에는 물레가 베틀의 생산성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런 불균형은 결국 세 가지 혁신으로 이어졌다. 1760년대에 개발된 제니 방적기를 이용하면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가닥의 실을 뽑아낼 수 있었다. 1768년에 발명된 수력 방적기는 이 과정에서 롤러와 축을 모두 활용함으로써 방적 효율을 향상시켰다.
1780년대에 개발된 뮬 방적기는 이 두 방적기의 특징을 결합한 것으로, 증기력을 활용할 수 있었다. 이런 새로운 발명품은 수력(나중에는 증기력) 자원 근처에 있는 공장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수력 방적기를 발명했다고 주장한 리처드 아크라이트Rchard Arkwright는 많은 자본을 모아 공장을 여러 곳 가동했는데, 공장마다 150명에서 600명을 고용했다. 다른 이들도 아크라이트의 선례를 따라 속속 공장을 세웠고, 영국의 섬유 제조업은 오두막 의 가내 공업에서 공장 산업으로 빠르게 바뀌었다.
제철 산업도 초기의 기계화된 공장 생산 추세에서 무척 중요한 구실을 했다. 18세기 초만 해도 영국 제철 산업은 미미한 상태였다. 선사 시대 이래로 늘 그래 왔듯이, 제련 과정에서 여전히 목탄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무렵이면 철광 주변의 숲이 거의 완전히 황폐해진 상태였다. 영국은 여러 식민지뿐만 아니라 스웨덴, 독일, 에스파냐 등에서 선철을 수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1709년에 에이브러햄 다비가 석탄에서 재련 과정에 사용되는 코크스를 만들어내는 공법을 개발했다.
철광 근처에 비교적 풍부한 석탄이 있었는데도 제철 산업에서 코크스를 널리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후반의 일이다. 무기와 탄약 산업에 관한 군사적 수요가 무척 커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수요가 커지자 코크스에서 남는 탄소를 제거하는 정련 공법이 발달하게 됐다. 압연기, 고온 용광로, 증기 해머, 금속 선반 등 온갖 혁신이 잇따라 진행됐다. 이 모든 발명은 철광 산업 과 탄광 산업의 급속한 팽창으로 이어졌고, 그 덕분에 다양한 산업에서 점차 철로 만든 기계가 널리 사용될 수 있었다.
다른 많은 산업의 기업가들은 생산량을 늘리고 가격을 낮추기만 하면 이 윤을 증대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창조적인 활동이 폭발"한 시대였다.
18세기 후반에는 기술 혁신에 관한 관심이 이례적으로 폭발했다. 1760년 이전 100년 동안에는 10년마다 발급된 특허권의 수가 딱 한 번 102건에 이르렀고, 보통은 22건(1700~1709년)에서 92건(1750~1759년) 사이였다. 그런데 다음 30년 동안 (1760~1789년)에는 평균 특허권 발급 건수가 1760년대 205전에서 1770년대 294건, 1780년대 477건으로 늘어났다(Bendix 1963, 27)
물론 이런 혁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증기기관의 발달이었다. 산업용 증기기관은 1700년대 초에 이미 도입됐지만, 기계적 난관 때문에 광산에서 물을 끌어 올리는 데에만 쓰이고 있었다. 그런데 1769년에 제임스 와트가 피스톤의 왕복 운동을 회전 운동으로 전환할 수 있게 정확하게 설계된 기관을 고안했다. 버밍엄의 볼턴이라는 제조업자가 와트와 동업 관계를 맺었고, 볼턴의 자금을 가지고 두 사람은 증기기관을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다. 세기 전환기에 이르면 증기가 수력을 밀어내고 제조업의 주요 동력원으로 빠르게 부상했다. 증기기관의 발달은 경제와 사회의 거대한 변화로 이어졌다.
이 새로운 대사건, 곧 증기기관의 발명과 더불어 산업혁명의 최종적이고 가장 결정적인 단계가 열렸다. 증기를 통해 산업혁명이 마지막 족쇄에서 해방되면서 대규모 산업이 거대하고 급속하게 발달할 수 있었다. 증기의 사용은 물의 사용처럼 지리적 위치나 지방의 자원에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석탄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살 수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증기기관을 세울 수 있었다. 영국에는 석탄이 풍부했고, 18세기 말에 이르면 석탄이 이미 여러 다양한 용도에 사용되고 있었다. 일부러 만든 운하 덕분에 아주 싸게 어느 곳으로든 석탄을 운송할 수 있었다. 나라 전체가 그 어느 국가보다 산업의 발달에 적합한, 특혜를 받은 땅이 됐다. 이제 공장은 계곡의 급류 주변에서 고립적으로 성장하지 않아도 됐다. 원료를 구입하고 완제품을 판매하는 시장에, 그리고 노동자를 충원하는 인구 중심지에 공장을 더욱 접근시키는 일이 가능해졌다. 공장들이 하나둘씩 인접해서 솟아올라 한데 모이면서 시커멓고 거대한 산업 도시들이 생겼고, 증기기관은 이 도시들을 늘 검은 매연 으로 애워쌌다.(Manloux 1927, 344~345)
주요 제조업 도시의 성장은 참으로 경이로웠다. 맨체스터의 인구는 1760년에 1만 7,000명에서 1831년에 23만 7,000명, 1851년에 40만 명으로 늘어났다. 제조업 제품의 생산량은 18세기 전반기에 약 두 배로 늘었고, 19세기 초에는 훨씬 더 빠르게 증가했다. 1801년 무렵에는 영국 노동력의 30퍼센트 정도가 제조업과 광업에 고용돼 있었는데, 1831년에 이르면 이 수치가 40퍼센트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리하여 산업혁명을 통해 영국은 공장 체제가 지배하는 대규모 도시 제조업 중심지들로 구성된 나라로 변모했다. 그 결과 생산성이 빠르게 중대돼 영국은 19세기 최대의 경제 선진국이자 정치 강대국으로 올라서게 됐다